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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국가다- 태양왕 루이 14세

중교개혁의 파도는 프랑스에도 밀어닥쳤다. 프랑스의 구교와 신교사이에 벌어진 위그노 전쟁은 30년 이상 계속되었고 그 때문에 프랑스 봉건제후의 힘은 약쳉화 되었으며 그것은 반대로 왕권강화로 나타났다. 이 전쟁중에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고 신교인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앙리 4세가 부르봉 왕조를 열게 되었다. 1610년 앙리 4세가 카톨릭 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아들 루이 13세가 아홉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어렷기 때문에 왕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이 되었다. 이 마리 드 메디치의 눈에 들게 된 것이 리슐리외였다. 이후 리슐리외는 죽을 때까지 루이 13세의 충실한 조언자로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정치를 움직였다.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그 아들 루이는 5살의 나이로 루이 14세로 즉위했다. 리슐리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이탈리아 출신의 마자랭 추기경이 재상이 되어 사실상의 실권을 쥐고 정채를 했다. 1661년에 마자랭이 죽자 22세가 된 루이 14세는 재상을 임명하지 않고 친정을 시작햇다. 그는 교육 담당자인 신학자 보쉬에게서 "왕의 절대적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라는 왕권신수설을 배우며 자랐다. "짐이 곧 국가다" 이렇게 믿은 루이 14세는 유럽대륙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왕이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나라들도 프랑스 왕의 부와 견줄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날로 국력이 강해지는 영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신대륙과 아시아에서 돈을 긁어모은 프랑스의 국력은 이윽고 영국에 맞설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는 파리 교외인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정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착공한지 20년 후인 1682년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겼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국왕과 귀족들에 의해서 화려한 궁정생활이 펼쳐졌다. 왕은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경기를 개최했고 트럼프와 당구 그리고 댄스를 즐겼다. 특히 연극을 좋아하여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의 연극활동을 보호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 시대에는 궁정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었다.

 

루이 14세는 에스파냐 왕녀 마리테레즈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또 한편 많은 애인을 두었다. 특히 12년 동안에 걸쳐 왕의 애인이었던몽테스팡 부인과의 사이에는 자녀를 8명이나 두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자의 복은 없었다. 마리 테레즈와이 사이에 얻은 황태자 루이는 세 아들을 남기고 천연두에 걸려 죽었고 루이의 장남 부르교뉴공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으나 그도 일찍 죽었다. 그외 외아들인 두살짜리 갓난애가 훗날 루이 15세가 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태양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지던 루이 14세는 이른바 '자연국경설'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국겨은 신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의 피레네 산맥, 서남쪽의 알프스 산맥, 북동쪽의 라인강이 프랑스 국경이라는 것이다. 루이는 그 당시 프랑스 영토가 아닌 라인강 방면의 영토획득을 위해 침략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침략전쟁을 위해 프랑스군의 근대화가 행해졌고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이 편성되었다. 이 강력한 군대로 프랑스는 우선 제2차 영구고가 네덜란드 사이의 전쟁을 틈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에스파냐 영토인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 3차 영국과 네덜란드 전쟁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았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전쟁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팔츠 계승전쟁이 10년동안 계속되었다.